조목사는 제대한지 며칠 안되어 수술 부위가 채 아물기 전이었지만 서대문 로터리에서 샘 토드 목사님을 강사로 한 부흥회에서 통역을 하였다. 신유와 기적이 넘치는 이 성회가 끝난지 보름 후, 조목사는 그 자리에 천막을 치고 제2의 개척 예배를 드렸다.

1961년 11월에 1천 5백석의 성전이 완공되었고, 1962년 2월 18일에는
'순복음 부흥회관'으로 명칭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해 4월 26일에
조용기목사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고, 5월 13일에는 교회 명칭을
'순복음중앙교회'로 변경했다.


그후 서대문으로 이전한지 3년 만인 1964년에는 성도수가 3천명이
되었으며, 다음해인 1965년 3월 1일에는 최목사의 딸인 김성혜 사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목회사역에 전념하던 조목사는 어느날 종일 수백명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집례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만에 퇴원하여 주일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갔다가
다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때 조목사는 체력적으로 사역의 한계에 부딪쳤으나 "...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수
없으리라" (출 18:18)
는 말씀에 따라 모세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을 세워 자신의 업무를 분담했던 것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던 것과 교회내 평신도, 특히 여자성도들을
활용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음을 알게 하셨다(롬16:).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주일에 조목사는 모든 제직들에게 이 뜻을 전하고 구역을 조직했다. 서울 지역을 크게 20개 지역으로 분할한 후 성도들에게 각 가정에서 이웃의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게 했다. 당시 여건상 어려웠던 평신도 여성들을 구역장으로
임명, 교육하여 구역을 활성화하자 교회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곧 이어 남자 성도들도 여성 구역의 성장에 도전을 받아 구역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날 청년,
아동 구역으로 발전했으며 남.녀 성인 지.구역장 수만 현재 13,660여명이다.) 구역을 조직한지 3년 후인
1968년에는 성도수가 8천여명에 이르러 주일예배를
3부로 나누어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날로 성장하는
교인들을 수용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자 조목사는
여의도에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여의도는 모래벌판이었고 교통편도 제공되지 않던 미개발지였기에 주위에서는 무모한 계획이라는 반대와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총 건축비가 8억원이 드는 공사였지만 교회에는 1백만원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목사는 기적의 하나님만을 믿고 성도들과 함께 건축헌금 작정에 들어갔다. 이에 당회도 그 뜻을 받아들여 대지 대금을 어음으로 지불한 후, 1969년 4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