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조용기 목사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조두천 씨와 모친 김복선 씨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17세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인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병석에서도 영어 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병이 호전되지 않자 공기가 맑은 고향 진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면서 부산으로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켄 타이즈 선교사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인도하던 천막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후 타이즈 선교사의 통역을 돕기도 하며 많은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이 없어 신앙적으로 갈등하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금식기도를 하던 어느 날 밤, 찬란한 광채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게 되었고, 성령충만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날 밤 복음증거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조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와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는 바로 여기에서 후에 목회의 동역자요, 장모가 된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순복음신학교를 1958년 졸업한 조 목사는 최목사와 함께 5월 18일 서울 변두리 대조동 최목사의 집에서 최목사의 세 자녀들과 함께 창립예배를 드렸다.
교회가 점점 부흥하여 성도가 50여명에 이르자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 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도들은 겨울에도 천막 교회에서 추위와 싸우며 밤새 철야기도와 새벽예배를 드렸고, 낮에는 대조동 일대를 다니며 전도했다.
6.25 전쟁 직후의 황폐한 생활 속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 목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케 되는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 각종 질병이 치유되었으며, 성도들의 삶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후 서대문 로터리에서 샘 토드 목사님을 강사로 한 부흥회에서 통역을 하였다. 신유와 기적이 넘치는 이 성회가 끝난지 보름 후, 조 목사는 그 자리에 천막을 치고 제2의 개척 예배를 드렸다.
1961년 11월에 1천 5백석의 성전이 완공되었고, 1962년 2월 18일에는 '순복음 부흥회관'으로 명칭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해 4월 26일에 조용기목사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고, 5월 13일에는 교회 명칭을 '순복음중앙교회'로 변경했다.
그후 서대문으로 이전한지 3년 만인 1964년에는 성도수가 3천명이 되었으며, 다음해인 1965년 3월 1일에는 최 목사의 딸인 김성혜 사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목회사역에 전념하던 조 목사는 어느 날 종일 수백 명의 성도들에게 침례를 집례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 만에 퇴원하여 주일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갔다가 다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때 조 목사는 체력적으로 사역의 한계에 부딪쳤으나 “...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 18:18)”는 말씀에 따라 모세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을 세워 자신의 업무를 분담했던 것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던 것과 교회 내 평신도, 특히 여자 성도들을 활용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다음 주일에 조 목사는 모든 제직들에게 이 뜻을 전하고 구역을 조직했다. 서울 지역을 크게 20개 지역으로 분할한 후 성도들에게 각 가정에서 이웃의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게 했다. 당시 여건상 어려웠던 평신도 여성들을 구역장으로 임명, 교육하여 구역을 활성화하자 교회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곧 이어 남자 성도들도 여성 구역의 성장에 도전을 받아 구역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역을 조직한지 3년 후인 1968년에는 성도수가 8천여 명에 이르러 주일예배를 3부로 나누어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날로 성장하는 교인들을 수용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자 조 목사는 여의도에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여의도는 모래벌판이었고 교통편도 제공되지 않던 미개발지였기에 주위에서는 무모한 계획이라는 반대와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총 건축비가 그때 당시 8억 원이 드는 공사였지만 교회에는 1백만 원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목사는 기적의 하나님만을 믿고 성도들과 함께 건축헌금 작정에 들어갔다. 이후, 1969년 4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여의도 새 성전의 건축 공사가 시작하자마자 중동 석유 파동이 일어났으며,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하락했다. 이로 인해 건축 자재 값은 폭등하고 많은 성도들이 실직하여 헌금이 줄어든 데다 은행의 융자도 축소되어 부채 압박이 극에 달했다. 여기에 건축 기술상의 문제까지 겹쳐서 교회 건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조 목사는 매일 밤 골조만 앙상하게 올라간 성전 지하실에서 뚝뚝 떨어지는 녹물을 맞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다가 지쳐서 시멘트 바닥에 쓰러질 때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자 성도들 사이에도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 매일 저녁 수백 명의 성도들이 지하실 바닥에 함께 엎드려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 결과 성전은 다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여 마침내 1만 명을 수용하는 성전이 완공되어, 1973년 9월 23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헌당 예배를 드렸다.
여의도로 이전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의 수직적인 성장을 보였다. 1979년에는 10만 성도를 돌파했고, 1981년에는 2배로 증가한 20만 성도가 되었다. 교회의 내적 성숙과 교육을 위해 제 1, 2교육관을 세우게 되었으며, 선교센터를 세워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하여 해외선교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 명칭을 현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꾼 1984년에는 40만성도가 되었으며 1992년에는 70만 명을 돌파하였다. 거리가 먼 지역에 지성전을 건립하기 시작, 지역사회 복음화의 효율적 방편으로 여러 교회를 독립시키게 되었다.
조 목사는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62년간의 목회 생활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드리며 성도들을 한결같은 자세로 섬기고 있다. 국내 전역에 교회개척과 기도처 설립, 인터넷과 방송매체를 통한 전 세계 선교 확장, 제 3세계와 북한을 비롯한 해외 선교의 장을 더욱 넓히고 있다. 이를 위해 조 목사는 전 성도들과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가고 있다.
오중복음·삼중축복·4차원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세계 선교에 힘써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셨으며 오순절 성령운동을 주도하여 전 세계 교회의 영적 갱신과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용기 목사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계속하여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되길 소망한다.
* 저서 및 작사
-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새천년을 위한 영적리더십 등 한국어 저서 325권
- The Fourth Dimension 등 영문 저서 49권 및 번역서 247권
- 얼마나 아프셨나, 내 평생 살아온 길 등 복음성가 30여곡 작사